[Best] [인문사회] 한국의 전통건축 통일신라 / 통일신라 시대의 건축 1. 도성 1929년 7월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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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23-02-06 16:37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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문천에 있었던 일정교터, 월정교터, 효불효교터, 서천의 鬼橋터 등은 신라왕경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리가 된다. 가로망은 井田法에 따라 구획되었을 것으로 格子形의 간격은 고려척으로 약 400척인데 남북은 일정치가 않아 360-400척 정도인 것으로 보고 있따 헌강왕 때에 신라 왕경은 대도시로 발전되었을 것을 『삼국사기』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따 헌강왕 6년(880) 9월 9일 「王與左右登月上樓四望 京都民屋相續歌.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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통일신라시대의 건축 1. 도성 1929년 7월의 조사에 의하면 왕경인 경.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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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. 『동경잡기』와 『동국여지승람』의 기록에 의하면 「신라정전유기상존」이라 되어있고 고서에는 井田遺基로 평양과 남원의 정전유기가 있을 뿐이라 하였다. 이 말을 듣고 왕은 중지하였다. 井田法이 사용된 시기는 통일 후가 아닌가 생각되나 일부 학자는 그 이전이라 보는 견해도 있따 그러나 고구려의 경우 장안성이 586년에 만들어지고 신라는 좀 늦은 통일 후가 아닌가 추정된다. 『삼국사기』에 의하면 문무왕 21년(681) 6월 「王欲新京城 問浮屠義湘對曰雖在 初夜茅屋 行正道則 福業長 苟爲不然 雖勞人作成亦 無所益 王乃之後」 (왕이 서울을 새로 만들기를 원하여 승 의상에게 意見(의견)을 물으니 이에 답해 말하기를 비록 草野茅屋에 살지라도 정도를 행한즉 福業이 길 것이나 그러하지 못하면 비록 힘들여서 새 서울을 만들지라도 무익할 것이라 하였다.)란 기록이 있어 새로운 서울을 만들려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따 신문왕 9년(689) 8월에 「王欲移都達句伐未果」라는 기록이 있어 달구벌로 이도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. 효소왕 4년(695) 서시 남시가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 시기에 황룡사 부근으로 왕경이 확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. 이와 같은 돌담 유구는 곳곳에서 발견된다.통일신라시대의 건축 1. 도성 1929년 7월의 조사에 의하면 왕경인 경...





[인문사회] 한국의 전통건축 통일신라 / 통일신라 시대의 건축 1. 도성 1929년 7월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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인문사회 한국의 전통건축 통일신라 / 통일신라 시대의 건축 1. 도성 1929년 7월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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통일신라시대의 건축 . 도성 1929년 7월의 조사에 의하면 왕경인 경주에서 분황사 서방 약 1町 및 서남방 약 5町 되는 곳, 그리고 황룡사 남대문 터에서 서서남방 약 1町 되는 곳, 또 황룡사 서남각 등에 담장터로 추정되는 돌담이 남아있어 이곳이 왕경이 중심부가 아닌가 생각되었다.